백두대간 무지원 단독종주기 (41일~52일) 백두대간 종주기 2008.02.07 10:40
제41일 1999년 5월 26일 (수) 흐림
백봉령 07:15~삽당령 16:00 [8.45]
비 소식은 오늘 오후부터란다, 한 번 더 비와 싸워보자. 삽당령까지다.
42번 철탑을 찾아 오르니 건너다 보이는 자병산은 정말 완전히 파 해처진 상태다. 43번 철탑으로 가는 길에 광산에서 길을 막아 놓아 도로까지 나왔다가 다시 44번 철탑을 찾아드는 고생을 해야 했다,
생계령까지는 카스트르지형[움푹 들어간 돌리네, 속칭 쇠골]이 여기 저기 눈에 띈다.
중 고등학생 때 지학과목에서 배웠던 것을 다 늙은 지금 눈으로 확인하는구나.
922m봉에서 자병산이 파 혜쳐진 모습을 다시 확인하며 대간 능선이 영원히 훼손되는 장면을 보니 안타까운 마음이다.
12:30부터 비가 조금씩 뿌리기 시작한다, 삽당령에 도착할 때까지 몇 번을 벗었다 입었다 했는지 모르겠다. 망할놈의 비 오려면 오던가 말려면 말던가 할일이지---,
바지(오바트라우저)는 입지 않으면 빗물이 바지를 타고 신발 속으로 흘러들어가 신발까지 적시게 되니 입지 않을 수 없고, 그러니 온 몸이 땀과 빗물에 젖어 오바트라우저를 입으나 마나 꼴이 되고 말았다,
바람은 세차게 불고 잠시 앉아 쉬면 한기가 온 몸을 엄습한다, 석병산을 지나 두리봉, 그래도 수풀이 잡목이 아니라 수월하다.
안내서의 16.2km 6시간은 잘못해석하면 종주자들에게 상황판단을 그르치게 만들 것 같다.
삽당령 내리막 임도에 나오니 저만치 포장마차가 보인다.
비도 뜸하기에 재빨리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안으로 들어가니 아랫마을 아주머니 서너 분과 남자 한분이 술을 마시고 있다, 먹거리는 감자부침과 라면뿐, 감자부침 한 접시와 막걸리를 시켜놓고 계눈 감추듯 널름 먹어 치우고 앉았으니 장단을 맞추던 아주머니께서 말을 부쳐온다. 이 우중에 왠 산행이냐? 고.
백두대간 종주중이며 그간 있어온 일들을 주변머리 없는 내가 술기운을 빌려 너스래를 떠니 아주머니들이 대단하다며, 무섭지 않았느냐? 왜로웁지 않았느냐? 힘(?)이 좋겠다느니 하며. 술 한 잔 받으란다, 이경구가 술 마다 하는 거 본 사람 있으면 어디 손 한번 들어봐!
결국 합석하여 주거니 받거니---, 나중에는 젓가락 장단에 마추어 한 곡조씩 꽝!
옆의 아저씨는 정선 아라리를 어찌나 처량하게 잘 부르는지, 밖에 오던 비도, 그리고 우리 모두도 숙연히 속으로 따라 읊으며 정선 아라리의 분위기 속으로 빠저 든다.
들을수록 정감이 넘치는 저 소리---, 언젠가 종주를 마치고 시간 내어 찾아와서 배우보고 싶어진다.
아쉽지만 비 예보 때문에, 또 옷도 말릴 겸 17:15분 버스로 강릉으로 탈출하다.
파 헤쳐진 자병산 정상이 많아 낮아졌다.
제42일 1999년 5월 27일 맑으,흐림
삽당령 06:30~닭목재 14:00 [7.30]
어제 술을 많이 마셔서인지 힘이 하나도 없다, 역시 과음은 항상 금물, 오늘 주행거리는 짧으니 천천히 쉬엄쉬엄 가자. 일기예보는 오늘 오후부터 국지성 소나기란다.
어제는 비에 대한 과잉 반응으로 공연히 하산하여 쪼들리는 경비만 축을 냈다.
안내서에는 이 구간이 독도가 굉장히 어려운 구간으로 되어 있는데 도대체 백두대간종주에 이제는 독도란 필요 없는 것이 되어버리고 만 것인가? 그만큼 흥미와 재미는 반감되고 말았다.
석두봉에서 보니 저 멀리 서북쪽으로 내일 주파할 고루포기산과 능경봉의 스카이라인이 뚜렷이 보인다, 두 산사이가 저렇게 멀었던가? 새삼스럽다,
능경봉을 보니 왕신리와 형님생각이 떠오른다.
몇 년 전 왕신리계곡에 와 계신 형님을 뵈러 대관령에서 능경봉을 넘어 횡계현 쯤에서 큰 골로 더텨 내려 형님을 찾아 뵌 적이 있었는데 그때는 초행이라 1/25000지도로 독도를 해가며 찾아 갔었는데 지금은 백두대간에도 독도가 필요 없으니 내 원 참---,
960봉, 989봉, 1006봉의 사이에서 멋진 황장목의 군락을 볼 수 있으며 아프리카의 정글을 연상시키는 원시림이 잘 보전되어 있어서 늦봄 녹음이 짙기 전 계절에 다시 한 번 와 보고 싶다.
12:30경 화란봉에 올라 담배한대 피우는데 잔뜩 찌프린 하늘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허겁지겁 한 시간 거리를 달려 내려오니 옷이 또 다 졌었다,
요새는 하루가 멀다하고 비와 싸우는 기분이다. 10분 거리라는 닭목재 휴게소가 왜 그렇게 먼지---,
안으로 들어가니 마침 농부들에게 식사를 제공하다가 비를 훔벅 맞고 무거운 배낭을 질머진 나를 어서 이쪽으로 앉으라며 자리를 내 주시는 권 오선(68)옹, 우선 안으로 들어가 옷부터 갈아입고 나오니 백반 한상이 잘 차려져 있다.
권 옹은 이곳 토박이로 요새 말로 학벌은 없으나 서당(강원도의 서당세가 만만치 않단다)출신으로 사방 벽에 손수 써 붙인 글씨가 그런대로 잘 쓰신 글이다. 말씀하시는 것도 조리가 있고 유식하시다,
5남매를 농사로 키우셨는데 요즘 자식들의 농사짓는 모습을 보면 너무 쉽단다,
2만평이나 되는 채소밭을 기계로 파종하고 기계로 수확해버리니 언제 파종했는지, 수확 했는지 알 수 없고 그저 계절이 지나서 밭에 싻이 나고, 또 아무것도 없는 빈 밭이 보이니 아- 이제 수확이 끝났구나---.한단다.
당신들이 농사를 지을 때는 소가 밭을 갈고 온 동내 일꾼을 다 품앗이 내어 한때기한때기 파종하고 김매고, 또 수확 때도 같은 방식으로, 하루도 쉴 날이 없었는데 요지음에는 "오늘 파종합니다"하고 나가면 해도 지기 전에 돌아와서 다 했단다. 그리고는 일꾼 들을 대리고 강릉으로 술대접하러 간다나---,
이제 농촌도 살기가 점점 좋아지는 모양이다.
15:00시가 지나니 날이 개이기 시작하며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한다, 영상 5도 이하로 기온이 내려가면 밭작물에 냉해가 든다며 안절부절 하신다.
저녁에는 직접 담그셨다는 청산별곡주와 안주인께서 강릉에서 장을 봐 오셨다는 초당두부, 오징어 볶음으로 겸상하여 주시는데 정말로 고마웠습니다.
백두대간 종주자들이 이따금씩 들러 부식을 사가기도 하고 자고 가기도 하는데 모두 젊은이 들이고 자신도 연로하셔서 그저 고객으로만 대하셨는데, 나의 나이와 나의 자세한 설명으로 백두대간의 의미를 아신 후 고마워하시고 반가워하시고 놀라워하신다.
내가 방에서 듣자하니 자식들한테 "저분 같은 사람은 어디다 버려둬도 살아남는다" 너희들도 저분 같은 정신으로 살아라 하신다,
역시 부모는 부모다, 다 자란 자식들이 아직도 미더웁지가 못하신 모양으로 저런 말씀을 하시니- 부모의 사랑을 언제 자식들이 알 수 있을까?
맹덕한우목장
제43일 1999년 5월 28일 (금) 맑음
닭목재 08:00~대관령 13:40 [5.40]
어제 소나기 탓인지 숲이 더 푸르고 공기도 맑다.
맹덕 한우목장이 타산이 맞지 않는지 쓸쓸하게 버려저가는 모습이다.
고루포기산 남쪽 송전탑쪽에서 보는 피덕령 고랭지 채소밭은 참으로 광활하고 인상적이다,
정상을 지나 한참을 임도로 따르다가 본격적인 등산로로 진입하니 여기도 산나물 천국, 왼쪽은 횡계가 숲사이로 이따금씩 내려다보인다.
횡계현을 조금 지나니 오른쪽 밑에 양수댐 발전소 공사가 한참이다. 산복을 전부 도로로 파 엎어 허연 속살이 다 드러나 보인다. 이렇게 밖에 할 수가 없는 것인지---,
내가 몇 년 전에 큰 골로 하산하던 지점을 지나니 감개무량하다.
능경봉에서 대관령으로 내려가는 능선안부는 커다란 나물밭(요새도 나물철이 되면 안내산악회로 엉망이 된다)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는지 풀밭을 완전히 뭉개버렸다. 드디어 대관령!! 횡계로 하산하여 한계령까지의 5일분 주 부식을 준비해야 되겠다.
어제 재준이에게 전화를 걸어 장호의 대관령부터 나머지 구간의 동반종주를 거부한 것에 대해 이해하도록 설득할 것을 부탁했다.
나의 이 대간 종주가 대단한 것은 아니지만 처음부터 혼자서 해온 일 끝까지 혼자 해보고 싶을 뿐이다. 이제 남은 구간은 1/5, 10여일 밖에 남지 않았고 또 이 구간은 나에게 대간종주 중 가장 중요한 결산기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40여일을 이어온 리듬을 바꾸고 싶지도 않고, "장호야! 미안하다"
인간은 경쟁의 동물이다. 내가 장호와 같이 동반종주를 하려면 처음부터 조화를 이루었어야 한다. 이제 와서 조금이라도 장호에게 의지 한다거나 아니면 경쟁의식을 갖게 된다면 지금까지의 노력이 헛수고가 되고 수포로 돌아가고 말 것 아닌가?
제일 싫은 행위가 낯설고 음침한 숲속에서 야영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주로 산정이나 헬기장을 야영장으로 선호해왔다. 장호와 같이 야영을 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 마음 이해 해주기 바란다.
곧 없어질 대관령 휴게소의 기념탑
제44일 1999년 5월 29일 (토) 맑음
국사성황당 06:15~진고개 17:00 [10.45]
국사성황당 앞에 도착하니 제복에 산불조심 완장을 걸친 사람이 철저히 통제한다. "이제는 완전히 하나의 큰 기업이다"라는 며칠 전에 읽은 기사가 실감이 난다.
재작년 눈 밟으러 왔을 때만 해도 작은 성황당에 불과 했었는데---, 오늘도 새벽부터 제를 지낼 준비가 한창이다. 길을 물으니 오른쪽 잡목으로 막아놓은 기존도로 우측으로 돌아서 가란다.
통신대로 통하는 시멘트포장도로 위를 한참 걸으니 정문 앞에서 왼쪽 숲속으로 우회하도록 등산로가 나있다. 통신대를 다 지나 새봉에 오르니 광활한 한일농장 목초지가 서쪽 발밑으로 끝없이 펼쳐지고 저 멀리 황병산 밑으로 삼양목장 목초지가 외국의 풍경을 보는 듯하다. 내가 지금 스위스에 와 있나?
선자령과 곤신봉을 지나면서 저 동쪽 발아래로 펼쳐지는 강릉 시가지를 바라보니 꼭 구름위에 떠서 내려다보는 것 같다.
오늘 날씨는 쾌청한데 왠 바람이 그렇게도 드센지 땀 한 방울 나오지 않는다.
선자령의 바람이 세다는 얘기는 들었어도 이렇게 기온까지 뚝 떨어질지는 몰랐다.
목초지 옆과 임도를 따라 매봉까지 오니 이 위까지 관광객이 차를 몰고 올라와 있다.
매봉 전 삼양목장 전망대에서 준비해온 도시락을 먹었는데도 배가 고픈 것 같다. 양갱을 꺼내 먹는데 기아의 마티즈가 이 험한 곳까지 올라오고 있었다. 엄지손가락을 들어 일등 차라고 했더니 아가씨가 빙긋이 웃는다,
인간은 자기가 하는 행위를 칭찬해주면 누구나 기분이 좋아지는 모양이다. 아주 간단한 진리인데 우리는 이것을 항상 잊고 지낸다.
소황병산에 오르니 정말 굉장한 목초지다 잘 자란 목초가 바람에 한쪽으로 누운 모습이 꼭 머리를 잘 빗겨 놓은 비단결 같다.
이 넓은 목장을 지나오면서 방목한 소 때가 한군데도 보이지 않기에 이상하다 했더니 매봉산을 지나 조금 가니 한 무리의 소 때가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 사진 몇 장 찍고 옆에 있는 목동(20세 미만)에게 물어보니 노임이 박해서 목동들이 다 나가고 없단다, 일당 15.000원에 식비공제라니 역시 박한 것 같다.
목장을 걸어서 완전히 통과하는데 약 5시간 정도 소요되는 거 같다.
황병산을 지나 숲속으로 들어서니 삼지구옆초가 눈에 띈다.
나는 그동안 등산을 배워 오면서 남들처럼 더덕이나 나물을 구분할 줄 모른다. 기껏 삼지구옆초, 나물취, 고사리 정도다.
노인봉 산장에 도착하니 관리인 정씨가 "미친놈 또 한사람 오는군" 한다.
무슨 뜻인가 했더니 백두대간종주자들을 정씨는 도잡아 미친사람으로 치부한다. 맞는 말이다.
미치지 아니 하고는 누가 이 짓을 5~60일을 걸려서 하겠는가?
내가 지리산부터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제일 자주보고 듣는 새소리(이름은 모름)는 그새의 울음소리가 찌---삐---찌하고 삼음절로 우는데 나는 그 소리를 미친놈---미---친---놈하고 따라 읊조린다. 정씨도 이 새의 친척인가 보다.
정씨의 너스레는 좀 듣기 민망스러운 부분도 있다. 그토록 산을 좋아하고, 자기 말마따나 미친놈 소리 들어가며 대간 종주 끝내고 산장하나 맡아 관리하면서 지금과 같이 생각이 비뚤어져서야 되겠는가?
좀 더 건전하고 산 후배들을 위한 건설적인 사고력을 키워나가야 하지 않을까?
집사람이 식량은 공급하지 않아도 어디 앞으니 약을 사서 보내라고 하면 재빨리 보내 준단다. 무슨 뜻인지?
또 휘귀식물이 발견되면 제자리에 놔두지 않고(손 탈까봐) 산장 근처 으슥한 곳에 옮겨 심어 놓고 친지(?)들에게만 자랑 아닌 P R 이라니 무슨 뜻 일까? 알만하다.
십시일반 심정으로 차 대신 특주(한잔에4.000원) 두 잔을 마시고 진고개로 하산---.
소황병산에서 우사가 있는 구릉지를 향해 촬영한 목초지 모습.
하마터면 이 커다란 목장을 지나면서 소를 못 볼뻔 했다.
제45일 1999년 5월 30일 (일) 맑음
진고개 06:15~구룡령 18:00 [11.45]
산장에서 숙박을 하니 배낭을 풀 일이 없어서 아침 출발이 빨라진다.
(휴계소에서 김밥두끼분 준비)
여기서 단독종주와 팀종주의 장 단점을 비교해보자.
단독의 장점 1.자기의지대로 행동할수 있다.
2.쉬는 시간이 짧아 먼거리를 갈수 있다.
3.행군하면서 한 가지 생각에 몰두할 수 있다.
단점 1.외롭다.
2.야영 시 시간이 많이 걸린다.(혼자 텐트 설치, 물 깃기, 취사)
3.위급 시 결정과 판단이 늦다.(길 잃을 때, 위험한곳 통과 시 등)
4.무게가 많다.
팀의 장점 1.무게 분산으로 가볍다.
2.야영 시 작업분담으로 시간절약.
3.외롭지 않다.
4.위기봉착 시 당황치 않고 안정이 된다.
단점 1.의견 충돌.
2.자주 쉼으로 행군거리가 짧다.
3.잡담으로 생각에 집중할 수가 없다.
팀을 구성할 경우 3명이 이상적일 것 같다. 2명은 팀의 와해될 위험이 가장 높다.
동대산~신배령~약수산 구간의 능선은 심심산골로 각종 산야초가 풍부한 곳이다.
원래의 계획은 응복산을 조금 지난 샘터에서 야영할 계획이었으나 생각보다 산행이 빨라져 구룡령으로 수정---, 일요일이어서인지 두로봉에서 등산객 한 팀을 만났다.
이들은 북대사 임도변에 차를 주차시키고 올라왔단다, 나물도 뜯을 겸---.
약수산에서 구룡령으로 하산하면서 지난1월에 없었던 산불 현장과, 새로 건물을 짓느라 동쪽편 도로를 차단하고 굴착작업하는 것을 보니 마음이 착잡하다.
구룡령휴게소에 들러 내일 아침과 점심에 먹을 김밥 주문하고 휴게소 뒤편에 야영을 하자고 했더니 한 마디로 "no" 이유인즉, 화장실을 엉망(세탁하고, 목욕하고)으로 만들어 놓고 간단다.
앞으로 대간종주자들은 산속에서의 자연보호만을 부르짖을 것이 아니라 민폐를 끼치지 않는 인간 정화도 부르짖어야 되지 않을까?
간신히 사정하여 허락받고 야영하다.
내일 아침은 05:00출발이다. 그래야 단목령까지 아니면 복암령까지라도 갈수 있다.
휴게소 아줌마가 고맙다, 주문한 김밥이 양도 많고 삶은 계란도 1개 더 싸 주셨다. 언제 고맙다고 인사드릴 기회가 있을지---, 이런 소박한 마음 씀씀이 인정인가 보다.
제46일 1999년 5월 31일 (월) 맑음
구룡령 05:15~단목령 20:15 [15]
빨리 서둔다고 서두른 것이 05:15분 출발이다. 아마 산행중 제일 빠른 출발인 것 같다.
오늘 코스는 가장 오지이고, 장거리이고 식수도 시원치 않기 때문이다.
또 이제부터는 진짜 찐드기 공화국에 진입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개념도 설명서의 거리와 시간이 맞지 않는 곳이 많아 애당초 출발하면서 주행속도와 개념도를 봐가며 수정하기로 했지만 도리 없이 부지런히 걷는 밖에---,
갈전곡봉을 지나 968고지 다음의 약 1000고지에 헬기장이 있어 1061봉과 혼동(여기에는 헬기장없음)으로 쇠나드리 전의 야영장에 도착 확인될 때까지 계속 독도를 해야 했고 수정확인을 해야 했다.
시간도 훨씬 많이 걸렸다.
조침령까지만 가기로 작정하고 물 3L를 준비, 쇠나드리를 거쳐 조침령에 도착하여 시계를 보니 개념도의 설명과 또 틀린다. 설명대로라면 4시간 이상 걸렸을 것을 2시간30분 만에 주파했으니 또 복암령까지로 연장할 수 밖에는---,
준비했던 물을 버리고 2시간여 먹을 식수만 남겨두고 달렸다.
양수댐 발전소 현장을 왼쪽으로 보면서 1138봉을 넘어 복암령에 도착하니 정확히 19:00시---,
야영하려고 배낭 벗어놓고 물 떠오고. 텐트를 설치하려고 주변을 살피니 넓직하고 깨끗하긴 한데 야영한 흔적이 없다 자세히 보니 멧돼지 소굴이 아닌가?
바닥을 보니 마사토의 잔모래는 그간의 비로 다 쓸려 내려갔고 굵은 모래만 있어 한참 쓸어 내야겠다. 에라 모르겠다---, 단목령으로 이동이다.
야간산행 감행이다. 하고 배낭을 다시 짊어지고 한 100m쯤 가다 생각하니 지금부터 단목령까지의 코스가 가장 길 찾기 힘들고 대간주자들이 많이 헤매이는 곳이란 설명서가 기억이 난다.
어이구 뜨거워라! 하고 다시 돌아와 배낭을 내려놓고 자리를 다듬으려고 옆의 싸리나무 가지를 몇 개 꺽는데 멧되지가 파놓은 구덩이가 자꾸 마음에 걸린다.
지난번 눈물샘에서 멧돼지 울음소리에 잠을 설쳤던 기억이 난다.
길을 잃고 헤매이건 여기서 멧돼지와 밤새 신경전을 벌이건 가고나 보자---,
다시 배낭을 걸치고 시계를 보니 (19:15) 15분을 허비했다. 1시간여의 식수만 남기고 다시 물을 버렸다. 지금까지의 대간길을 봐서는 이곳도 분명히 길이 잘 나있겠지, 용기를 내어 875고지를 향해 오른쪽 표지기를 따라 나섰다. 역시 길은 잘 나있었다.
표지기만 잃지 않으면, 또 가장 잘 다듬어진 큰길로(?)만 따라가면 된다.
펑퍼짐한 능선에 올라서서 살펴보니 역시 길이 제대로 뚤리어 있지 않았을 때의 대간종주자들이 고생했을 이유와 방황 할 수밖에 없었을 상황을 상상해 볼 수 있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 가고 가지에 걸린 표지기도 코앞에 닦아 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게 되었다.
해드랜턴을 꺼내 불을 켜고 잘 뚤린 길을 10여분 왔을까 왼쪽에서 물이 콸콸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아, 아 다 왔구나!---. 앞으로 10분---. 도착하니 20:15분 날은 완전히 어두웠고 그림자만 어슴프레- 내일 비 예보로 내가 만일 30분만 더 일찍 도착했어도 오색으로 하산했을 것 같다. 이제 물 걱정은 없으니 남은 물로 라면을 끓여 먹고 침낭 카바속으로---,
언제 잠이 들었었는지도 모르겠다.
15시간의 강행군 가장 길고 힘든 행군이였다. 이것이 모두 내일의 일기예보 탓이다.
한 쪽으로 야영할 자리는 있으나 차도와 너무 가깝고 물이 귀하다.
제47일 1999년 6월 1일 (화) 흐리고 안개
단목령 07:00 ~한계령 13:10 [6:10]
오늘은 비교적 짧은 거리이고 여러 번 다녀본 길이다.
어제 오후부터 온다던 비가 오늘 오후부터 내릴꺼란다. 거리상으로는 늦으막이 출발해도 좋겠지만 비 때문에 피곤을 무릅쓰고 또 일찍 서둘렀다. 내 몸은 정말 무쇠일까?
어제 그렇게 많이 걷고도 한숨 푹 자고나니 견딜 만하다. 안내서에는 10시간 소요로 되어 있으나 내 경험으로는 그렇지 않다. 배낭 무게를 감안하더라도 너무 겁주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홍포수막터를 지나 정상까지 3시간 20분, 점봉산은 잔뜩 까스가 차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 유명한 점봉산바람만 겨울과 같이 세차게 불어댄다. 깊은 까스에 방수방풍의를 꺼내 입고 사진만 한 장 얼른 찍고 하산을 서두루니 서운하다. 그런데 점봉산에는 정상석이 없었었나?
자꾸 설악산쪽을 처다 보지만 짙은 안개뿐이다.
정상에서 망대암으로의 하산 길은 항상 그렇드시 짙은 안개와 매서운 서북풍이 온 몸을 움츠리게 하고 모자를 깊이 눌러쓰게 한다. 모자는 한번 바람에 날리면 찾을 길도 없고 찾아 나설 체력도 없다.
그런데 어제부터 이상한 표지기가 하나 눈에 띈다, 노란색의 2명 1조의 것인데 밑의 날짜 난에 99년까지는 인쇄가 되 있고 월, 일은 매직팬으로 그날그날 기입하고 있는데 어제 같은 날에 같은 코스를 주파한 것 같은데 나는 혹시라도 단목령에서 해후하게 되지나 않을까 기대했었는데
보이지 않기에 이들도 역시 비 소식에 오색으로 하산 했구나 하고 지레짐작 했었다, 그런데 점봉산 정상에서 오늘 날짜의 같은 표지기를 발견하고는 귀신에 홀린 듯 했다. 분명 홍포수막터에서 야영을 했구나. 그렇지 않고 오색에서 올라 왔으면 이렇게 일찍 지나갈 수가 없다.
이 표지기는 계속 한계령내리막까지 나를 한발 앞서 가고 있었다.
시계는 제로, 도저히 방향감각이 없다. 필례쪽으로 빠지지 않으려고 부지런히 나침판과 표지기를 따라 걸었다. 연신 걸으면서 이상하면 나침판을 꺼내어 방향을 잡으며 비 보다 빨리 한계령까지 가려고 안까님 쓰고 있다.
드디어 만물상 위쪽의 암봉구간을 넘어야 할 곳에 왔다.
암벽을 기어오르고 자일타고 내리기를 몇 번 드디어 비가내리기 시작한다.
이 암벽을 다 통과하기 전에는 불편해서 오바트라우저를 입을 수가 없다.
비야 조금만 참아 다오 드디어 암벽코스를 통과하니 한계령의 오색쪽 도로위가 그래도 훤하게 비친다. 차 소리도 들린다.
살았구나 싶다. 이미 옷은 다 저�고 오바트라우져를 꺼내 입을 만큼 세차게 내리지도 안는다.
필래쪽 도로변의 절개지 철책옆으로 우회하여 나와 삼거리에 도착 오색으로 가는 차를 세우니 막무가네다. 이 위치에서는 차 세우기가 적당치 않음을 알고 터덜터덜 비를 맞으며 한계령으로 올라갔다.
휴게소에 들어가 커피 한잔 마시며 창밖으로 만물상을 바라보니 언제 봐도 장엄한 만물상이 안개 속에서 시커먼 실루엣으로 다가온다. "장하다 경구야" 하는 것 같다.
밖에 나와 한참 만에 겔로퍼에 편승 오색까지 하산, 지난겨울에 묵었던 다래방 민박에 들어가 마음이 변하기 전에 2일분 방 삯을 미리 지불해 버렸다.(내일 날씨가 좋으면 또 안전부절 할까봐) 엊그제 피로를 풀어야 되겠다. 이제 여정도 4~5일 정도 남고 계획보다 앞섰으니 몸도 좀 챙겨야겠다.
점봉산 정상에 있는 산악인의 추모비
정상석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제48일 1999년 6월 2일 (수) 비
공치는 날이다.
진부령에서 백두대간은 끝이 나지만 내 인생에서는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고 재 도전이다.
닭목령 쉼터의 권옹 말씀 마따나 " 이런개는 어디 갔다 놔도 산다" 라는 말 그대로 된 놈이다 단 현실을 정리하지 못하고 미적이고 있는 것이 문제다.
기회가 되면 모든 문제들을 솔직히 털어 놓고 이해와 설득으로 새 출발을 할수 있도록 노력해야 되겠다.
온천탕에 들어가 목욕하면서 내 몰골을 쳐다 보니 살이라고는 한점 없이 뼈와 가죽만 남은 것 같구나.
54.4kg 성인이 된 이후 이렇게 가벼운 체중은 처음이다.
엊그제 15시간 뛰고나서 잠을 자고 난후 엉덩이 부위가 눅눅하다. 허리, 다리,엉덩이의 운동이 심하니까 자는 동안에도 그 부위의 근육(신경)이 생리작용을 멈추지 아니하고 활동하는가 보다 그러니깐 열이 나서 땀이 나고 그 땀이 고어택스를 통해 위로는 다 발수가 되어 보승보승해도 바닥 메트에 막혀있는 엉덩이 부위는 눅눅한것 같다.
내 육체와 건강문제에 대헤 대간 종주 끝난 다음 균헝있는 발전을 위해신경을 써야 되겠다.
어느 한부분에 치우치면 않된다.
제49일 1999년 6월 3일 (목) 맑음
한계령 07:30~회운각 15:00 [7.30]
다래방 주인 심군이 차를 내 주어 한계령까지 와서 산행을 시작한다.
올라오면서 엊그제 고생했던 만물상 암벽코스쪽을 바라보았다. 산은 언제나 의젓하게 제자리를 지키고 있다. 밖에서는 모르는 것이 산이고, 안으로 들어와 봐야 그 산의 진미를 알게 되는가 보다 저 산 어디에 그런 멋진 코스가 있었는지---,
삼거리밑의 샘터에서 예의 그 표지기를 또 발견했다. 역시 6/3 이들이 귀신인가? 벌써 여기를
통과했다니 도대체 몇 시에 출발했단 말인가? 그리고 이들도 2박을 했단 말인가?
한참을 오르는데 뒤에서 한때의 부녀산악회원들이 올라온다. 내가 표지기를 부치는 것을 보았는지 애쓴다며 치하한다.
순탄한길에서 한 회원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이 부녀 회원도 위장병을 등산하는 바람에 고치게 되어 부부가 다 등산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원래는 어제(수) 오기로 되어 있었는데 비로 순연되는 바람에 부군은 못 오고 혼자 왔단다.
백두대간은 그냥 지리산부터 진부령까지 산행한다는 정도로 알고 있기에 대간과 정간 정맥에 대한 개념을 잘 설명하고 그 주릉을 타고 있다니깐 새로히 놀라움을 표한다.
덕분에 부인으로 부터 오이 2개를 나누어 받았다.
날씨는 쾌청하나 운해는 별로다, 뒤를 돌아보니 한국의 마터허론과 귀청 그 뒤로 안산의 뾰죽한 봉우리가 보인다,
가운데가 귀때기청봉, 좌측이 가리산과 주걱�, 우측 뾰죽봉이 안산이다.
이제 종착역이 가까워오는구나 생각하니 감개무량하다.
끝청을 지나 안부를 휘이 도니 산장과 대청 오름길에 점점의 원색 옷을 입은 등산객들이 보인다,
역시 이 산은 평일에도 등산객이 많구나.
대청의 능선을 놓고 천불동의 안개와 한계령의 냉기가 서로 능선 사수 쟁탈전을?
산장 앞 의자에 앉아 손수 말아 온 김밥을 먹으며 인천에서 왔다는 음악인과 대화를 나누니 인천씨 왈 “행사가 계획되면 훌쩍 집을 떠나 산에 든단다. 이유는 정신이 맑아지고 폐활량이 커진단다" 오르신 말씀---.
나도 이번 대간 종주로 자신이 놀랠 정도로 폐활량이 커 졌으니깐---.
갑자기 북쪽 천불동계곡에서 까스가 몰려와 대청안부를 넘으려고 버둥거린다. 그러나 한계령쪽에서 불어오는 찬 바람 때문에 대청의 능선을 넘지 못하고 하늘로 치솟아 흐트러진다.
갈길도 바쁘지 않아 등산객들의 흐름을 넋을 놓고 보다가 인천씨가 뽑아온 커피를 마시고 대청으로 올랐다. 인천씨는 중청에서 자고 내일 떠난다며 나의 회운각행(통제구간)을 배웅 해 주겠단다.
오를 때 마다 감개무량한 대청봉정상 오늘은 안개로 속초쪽이 보이지 않는다.
가시철망 너머 들목을 찾아내어 인천씨와 혜여져서 회운각에 내려오니 왁자지껄 등산객으로 붐빈다.
회운각 주인 권동현씨가 내 차림새를 보더니 대뜸 종주중이냐고 묻는다. 그러면서 이 분들도 종주중인데 조금 전에 막 도착 했단다.
예의 그 리본(6/3)의 주인공 정연석과 윤희수다. 수인사를 나누고 그간의 일들을 시간가는 줄모르고 떠들어 대는데 우리를 가운데로 등산객들이 빙 둘러서서 경청하고 있다. 역시 대간 종주는 산악인들에게는 선망의 대상인가 보다.
정연석과 윤희수는 아산 청심산악회 등반대장 출신으로 4/4일 지리산 출발6/6일 진부령 도착이란다.
이들 두 사람은 어려운 2인 1조를 잘 조화를 이루어 이곳까지 재미있게 주파한 듯하다.
내일 나의 계획은 저항령인데, 옆에서 우리의 대화를 듣고 있던 권동현(회운각관리인)씨는 미시령까지 그 실력이면 쉽게 갈수 있으니 걱정 말란다.
정연석, 윤희수 콤비와 헤후의 기쁨, 나머지 구간을 무사완주 할 수 있도록 축복하고---.
내일이여! 우리의 여정을 위하여 축복할 지어다. 오랫만에 기분 좋게 꿈나라로---.
제50일 1999년 6월 4일 (금) 맑음
회운각 07:30~미시령 17:00 [9.30]
06:30시 아산팀을 먼저 보내고 미시령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천천히 아침 식사를 하는데 어제 우리의 대화를 주위에서 듣던 다른 등산객들이 왜 같이 안가고 처져 있느냐고 묻는다. 나는 그들과 한 팀이 아니라고 하니---, 그럼 혼자서 종주 하느냐?고 물으며 ---, 대단 하다고 혀를 끌끌 차며 칭찬이다.
천화대에 오르니 울산바위가 운해위에 두둥실 떠 있다.
그 밑에 속초시와 바다가 가라 앉아 있듯이---,
겁나던 공룡능선 코스도 옛이야기인가? 이제는 어린아이도 갈 수 있도록 길이 잘 나 있다.
생각보다 빨리 마등령에 올라 점심을 먹고 저항령으로---
나에게는 더 이상 힘든 너덜지대가 아니다. 도리어 만물상 암릉이 더 힘들다니---, 이 역시 배낭무계가 원인이 였었구나.
내친김에 배낭의 무게에 대해 이야기 해 보자.
물론 25~30kg의 배낭이 무겁지 아니 할리 있나, 그러나 50여 일간을 그 무게에 길들여진 나는배낭을 벗어 놓으면 걸음을 더 걸을 수가 없다. 위(상체)가 흔들려서 좀처럼 걸음이 걸어지질 않는다. 흔들흔들 꼭 흐느적거리는 같다.
아침 출발 때 3L의 물 즉 3kg을 추가하여 짊어지고 걸으니 그 물이 다 떨어져 갈 때는 분명 배낭의 무게가 3kg이 줄고 가벼워 졌을 텐대도 가볍게 느껴지지를 않으니---,
그것은 그만큼 체력소모가 있었기에 출발 때 30kg이 후의 27kg과 같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으리라.
무게와의 싸움은 훈련으로 극복해낼 수 있다. 그렇다고 쓸모없는 잡동산이를 배낭 안에 쑤셔 넣을 필요는 없다. 그리고 어제 정연석 대장이 이런 말을 했다. 출발 때 같고간 물건을 1차 중간보급 때 전부 돌려보냈는데 그때 보내면서 느꼈단다. 이 무게는 나의 욕심 덩어리이다.
욕심을 버리면 무게는 가벼워진다고, 등산인들(장기산행)은 모름지기 이 명언을 명심하도록 부탁한다.
정연석(56) 대장은 젊어서 위장병으로 고생하다가 산을 타고부터 건강을 회복하여 부인께서도 산행만큼은 절대 권하는 상태이고 윤희수(55)는 산행경력이 불과 3년밖에 되지 않으나 열심히 배우고 훈련하여 출발 전만 하더라도 매일 20km이상 조깅으로 체력을 키워 온 성실파란다.
이들 둘이서 콤비가 되어 백두대간 종주를 마칠 수 있었던 것은 (정은 갈비씨, 윤은 뚱보, 따라서 성격도 날카로움과 중용의) 서로 상극된 성격을 잘 조화시킨 것에 묘미가 있지 않는가? 생각된다.
인간에게서도 이런 조화의 묘로 해로하는 부부들을 찾아 볼 수 있겠다.
저항령에서 점심을 먹는 두 사람을 부뜰었다. " 형님 되게 빨리 쫓아오시네" 이제는 할 수없이 나머지 미시령까지 서너 시간 행군을 같이 하게 되었다.
황철봉은 산에 철분이 많아 나침판이 작동되지 않는 국내의 유일한 지역이다.
울산바위로 갈라지는 능선에 올라서서 바라보니 동해에서 짙은 운무가 미시령을 넘어 서쪽계곡으로 흐른다. 꼭 문지방을 넘어 들어오는 연기 같다.
그 안개 속으로 휴게소에서 틀어 놓은 음악소리가 어느 항구에서 이별의 슬픔을 달래듯 처량하게 들려온다. 휴게소에 내려서니 짙은 운무는 안개비로 바뀌어 금방 옷을 축축하게 한다.
같이 휴게소에 올라가 식사와 반주로 여담을 나누었다.
황철봉의 지루한 너덜, 윤은 바위라면 질색이라느니, 미시령~회운각 사이가 생각보다 시간이 적게 걸렸다느니, 내일, 모래 이틀간만 더 하면 이 짓도 끝이라느니---.
정대장의 주선으로 휴게소 동북쪽 아늑한 곳에 천막을 치고 내일 일정을 위해 꿈나라로---.
가운데봉이 대청봉 우측의 더 높게 보이는 봉이 중청이고 공룡능의 바위군들
공룡능선의 용트림하는 암릉 모습.
황철봉에서 바라본 안개에 쌓인 울산바위
제51일 1999년 6월 5일 (토) 맑음
미시령 07:30~마산 16:00 [8.30]
아침에 일어나니 짙은 안개로 천막이 온통 물에서 건진 것 같다. 대충 물기만 털어서 배낭에 넣고 짐을 꾸렸다. 오늘 대간령이 마지막 밤이 되겠구나 생각하니 착잡하다.
셋이서 같이 휴게소에 올라가 국밥으로 아침을 해결하고 칙칙한 안개 속을 상봉과 신선봉을 향해 무거운 발걸음을 옮겼다.
안개 속에 같여있을 때는 온천하가 안개로 가득한 줄 알았는데 고도를 높여 8~900정도 오르니 안개 속에서 벗어나 맑은 하늘을 볼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황철봉이 운무위에 두둥실 떠 있다, 꼭 망망대해에 떠 있는 거대한 군함 같다, = 어디로 가는 배일까? = 누구를 태우고 가는 배일까? =
해가 뜨면서 안개는 점점 위로 퍼지면서 정상 부위만 남기고 온천지를 덮어 버렸다.
서북쪽 소간령계곡에서 계속 몰려와 신선봉 정상 부위만 뻐끔 얼굴을 내밀게 하고는 축축한 습기를 밀어부친다.
그 속을 상봉의 암릉코스를 몇 군데 지나고 화암재를 거쳐 신선봉에 올랐다. 이제 마산만 남았구나!
신선봉에서 서북릉을 타다가 1100고지에서 표지기를 잘못보고 서남계곡으로 잘못 빠졌다가 다시 위로 오르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제 다 와가니 이런 실수도 재미있다.
대간령을 향한 서북능선은 굴곡없는 완만한 내림길로 약 2km정도 가니 안부가 나타나며 주막터며, 집터가 여기저기 있는 대간령이다. 상봉과 신선봉구간도 그런대로 재미있는 구간이다.
정대장의 요리법대로 참나물 약간 뜯어 라면과 같이 요리하니 이것이 바로 별미다 향도 좋고 라면과 같이 씹히는 참나물 맛은 먹어보지 않으면 설명 불가---.
야영은 마산 턱밑에 있다는 새 샘터(회운각 권씨의 안내)에서 하기로 하고 다시 출발 약 900고지되는 봉을 넘으니 펑퍼짐한 안부가 죽죽 뻗은 원시림으로 나무 밑은 초원이고 나무허리께는 잡목하나 없이 뻥 뚤렸다. 안개 때문에 더욱 침침하고 을씨년스런 안부를 지나 다시 오름길---,
잠깐 시야가 트일 때 보니 진행방향에서 90도 북쪽으로 높은 봉이 보인다.
개념도를 꺼내어 확인해보니 그 봉이 마산이다.
정대장과 윤은 앞봉(1060)에 거의 다 올라가 있을 것이고 ---, 가만히 길을 잘 살피니 오른쪽으로 트레버스 하는 희미한 길이 보인다. 그리고 저쪽 안부까지 거의 시야에 들어오는데 장애물이 없다.
옳지! 이 길로 앞거 가서 놀래켜 주어야지 하는 장난끼가 발동하여 샛길로 트레버스하여 안부에 도착하니 그들은 1060봉에서 나를 기다려 주는지 소식이 없다.
할 수없이 " 야호" 하고 외치니 화답은 오는데 뒤를 향해 나를 찾는 것 같다.
한참만에 도착한 그들은 나를 기다렸단다. 지나첬나? 미안하군---.
나는 그들이 오는 동안 널려있는 참나물을 듬뿍 수확했다. 회운각 권씨가 가르쳐 준 샘터를 찾다가 결국 마산 정상까지 오고 말았다.
발밑에 알프스 스키장이 보이고 진부령이 짐작으로 저만치 보인다.
여기서 예의 팀 인원에 대한 문제를 다시 논해 보자.
윤희수는 이길로 바로 마을까지 가서 자자하고 정대장은 가다가 적당한데서 야영하고 내일 시간 마추어 내려가자거니 실갱이다.
나는 아무래도 내려가고 싶지 않다. 여기서 조용히 내일을 결산하고 싶을 뿐이다. 내가 먼저 결정을 내렸다, 나는 여기서 쉬면서 지난 대간종주를 돌이켜 보고 싶으니 두 분은 먼저 내려가십시요라고---,
결국 그들도 마음을 바꾸어 내 옆에 배낭을 풀고 천막을 쳤다.
내가 아무말도 하지 않았으면 마을로 하산하였고 그렇게 되었으면 내일의 환영대회와 해후가 그렇게 실감나지 못했을 것이다,
정대장의 마지막 요리 솜씨 발휘로 1.8L(윤희수가 미시령에서 몰래 챙겼다) 소주 한 병을 다 비우도록 대간종주자들의 회포를 풀면서 밤을 지샜다.
정대장의 산행 시 막장 제조법---고추장과 되지비계를 볶다가 멸치가루를 넣고 불을 끈 다음 마지막에 생강과 마늘 찧은 것을 넣는다. 그래야 생강과 마늘의 향이 살아난단다. 이 막장은 쌈도 좋지만 즉석 찌개 양념으로도 일품이란다.
안개바다에 두둥실 떠 있는 황철봉.
마산정상에서 윤희수 본인 정연석
제52일 1999년 6월 6일 (일) 맑음
야영지 09:00~스키장 10:20 [1:20]
습관대로 아침 일찍 눈이 뜨인다.
오후 1시까지 어떻게 기다리나 내가 너무 가까이 와 있는 것이 아닌가.
옆의 정대장 천막에서도 부시럭거린다. 이제 더 갈 곳도 없다.
이런 느낌이 대간종주자들이 느끼는 허탈감인가 보다 마지막 1개 남은 라면으로 마지막 아침 만찬을 하고 정대장과 윤희수를 먼저 떠나보내고 쓸쓸히 시간을 죽인다.
오늘이 일요일이고 이지점이 대간종주의 끝이고 시발점이기도 해서인지 오르는 팀 한 팀, 내리는 한 팀(새벽 2시 미시령 출발)이 우리 옆을 통과 했다.
배낭을 다 꾸려 옆에 놓고 생각에 잠겨 본다. 대간종주가 나에게 무엇을 안겨주었는가?
긴수염, 홀쭉해진 뱃가죽, 무게중심이 뒤바뀐 어깨와 다리, 배낭을 메지 않으면 제대로 걸어지지 않는 걸음걸이, 금이 간 갈비뼈---,
그렇게 잘 가던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는가? 배낭을 메고 10분쯤 가다 쉬고 또 가다 쉬고를 반복해 보지만 시간은 흐르지 아니하고 멈추어 있는 것 같다.
알프스 스키장 맨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골프를 치는 몇 몇 사람만 휠드를 걷는 모습이 무척 한가롭고---, 시즌이 아닌 스키장은 그저 쓸쓸하기만 하다.
멀리 마을 어디선가 잡화를 팔러 다니는 봉고차의 마이크 소리만 한가롭게 들려온다.
이제 인간의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가?
저 속에서 또 다시 뭇 인간들의 질시와 속이고 속고 뺏고 빼앗기고 떼밀리고 끌려 내리우며 아귀다툼으로 살아가야 하는가?
대간종주 중 나도 모르게 자연과 친화된 자연과 합일이 된 이 삶의 방식을 존속시킬 수는 없는 것일까?
오직 마지막 1개의 라면과 반수통의 물만 있으면 그 날의 만족을 만끽할 수 있는 동물과 같은 순수한 삶을---,
그런 곳은 어디 없을까? 에덴의 동산---,
그곳은 정말 이상 속에서나, 꿈속에서나 가능한 세상일까?
욕심! 정대장이 말 하였듯이 배낭의 무게가 바로 자신의 욕심의 무게였기에 모두 비워 버렸다고 하듯이 인간의 세계로 내려가서는 배낭의 무게를 비워야겠다, 배낭의 무게를 비울 수 있을 때 그 곳이 바로 나의 에덴의 동산이 될 수 있을 것 같다.
09:30시 시간은 왜 이렇게 안 가는가? 다시 배낭을 짊어지고 천천히 걸어 본다.
시간을 죽여 가며 인간의 세계로 한발 한발 닥아 간다.
10:20시 콘도 관리사무소 앞 공중전화 부스에서 전화를 거는데 낯익은 모습의 사람이 탄 액셀 한대가 옆을 지나간다. 한참 통화하고 돌아 서서 보니 차에서 내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재준, 병석, 장호가 아닌가 반가워서 "준아" 하고 소리치니 그들도 나를 알아보고 우루루 몰려온다.
한참을 왁자지껄 떠들어 대고는 우선 종주축하 축배를 들러 가잔다.
내가 잠깐 이곳을 벗어나기 전에 진부령부터 들려가자니 의아해 한다.
가보면 알게 된다고 말하고 진부령으로 차를 몰았다. 도착하니 11시 조금 넘었다.
아직 정대장이나 그들을 환영할 버스는 도착 전이다. 우선 식당에 들러 막걸리로 축배를 들고 기다리며 정대장팀과의 해후를 설명하고 오늘 여기서 있을 폐백을 보러 왔다니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 한다.
정대장은 백두대간 종주 시작 전날 아들을 장가보내고 그 자리에서 있을 폐백을 오늘 종주를 마감하는 이 자리에서 갖기로 한 기인이라고 설명하니 "역시나" 하고 감탄 아닌 찬사다.
드디어 버스가 먼저 도착했다. 조금 있더니 집 뒤 산에서 예의 그 두 멎진 사나이들이 내려온다. 나도 대간종주자인데 왜 그들이 부러워지는 걸까?
전적비 앞에서 기념촬영을 끝내고 다음의 해후를 위해 안녕---,
부디 건강하고 열심히 산행하면서 다시 산에서 맞납시다---,
영원한 산 친구들이여!
진부령 전적비 앞에서
나의 백두대간종주 마감을 축하하러 멀리 서울에서 온 친구들
대간종주를 마치고
대간 종주는 단독이냐, 아니면 팀이냐에 따라서 그 스타일이 달라진다. 또 단독일경우도 각자의 성격과 목적에 따라 달라진다. 유유자적하며 구석구석 나무 하나 풀 한포기 바위 하나라도 노칠세라 관찰하며 시간과 관계없이 종주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러나 나는 그러지를 못했다.
나는 계획과 준비를 오직 월간 산과 몇 사람의 종주기를 기초로 혼자 계획하고 준비 했다.
다니던 직장에서 떠나야 할 날이 정해지자(3월15일) 전격적으로 4월16일을 D-데이로 정해 놓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마음속으로는 항상 기회가 와 주기를 바랐고 체력관리는 만일을 대비 꾸준히 연마 해 왔었다,
종주 계획서도 8회 중간지원 방식으로 짜여졌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니 지원 받을 수 있는 소속 산악회 한군데도 없는 내가 8회씩이나 중간지원을 받는다는 것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란 것을 마지막 단계에서 알게 되었고 또 그렇게 할 경우 단독종주의 의미가 반감한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결국 철두철미하게 단독종주라는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쪽으로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4월 16일 계획대로 출발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나는 근간의 대간종주방식에 대해 너무 정보가 어두웠고 조금은 무모 했었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결국은 가장 멋지고 고전적(?)인 스타일의 대간 종주꾼이 되긴 했지만---.
초기 30kg의 배낭을 짊어지고 지리산을 유평리에서 오르는 나의 모습을 상상해보라.(이 배낭 안에는 15일분의 주부식과 천막, 침낭, 예비 옷, 보조자일 20M, 그리고 진부령까지 사용할 소모품들이 꽉 들어 차있었다) 결국 추풍령에서 그간 보름여의 터득한 경험으로 몇 가지의 장비가 바뀌고 필요 없는 것들과 또 중간에서 구입 할 수 있는 것 등이 내 배낭에서 빠져 나가고 필요에 따라 적당한 곳에서 하산하여 휴식도 하고 부족한 물품들을 보충하면서 진행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하였는데도 추풍령 출발 시 물 3L(3kg)을 포함하여 28KG이하로 줄이지를 못 하였다.
일주일분 주 부식 간식 포함4~5kg에 불과하니 일주일 끝 날에도 23KG은 어쩔 수 없는 무게다.
대간종주는 물과 무게와의 싸움이라 하였는데 무게와의 싸움은 이정도 무게에서 체력으로 극복해야 하며 나는 극복하였다.
출발당시 나의 체중은 60kg, 내 체중의 1/2에 해당되니 과중한 무게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계령에서 계체량 결과 54.5kg 였으니까 나는 결국 내 체중의 1/2도 훨씬 넘는 무게를 이겨낸 샘이다, 배낭의 적당한 무계는 자기 체중의 1/3이였다.
대간종주 시 식수의 해결은 정말 난처한 문제다, 물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물 때문에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하며 진행에 차질을 주지 않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다행이도 1999년 봄에는 봄비가 많이 왔었던 관계로 내가 종주할 때는 거의 능선상의 샘들은 다 살아 있었으며 샘이 아니더라도 계곡을 잘만 뒤지면 왕복 20분 내외로 식수를 구할 수 있었다.
나의 경험에 비추어 최악의 경우라도 왕복 40분이면 물은 걱정 안 해도 되었다.
그러나 그 무거운 배낭을 능선에 벗어 놓고 내려갔다 온다는 것도 문제지만 빈 몸인데도 왜 그렇게 걸음이 안 걸리는지 모르겠다. 무게중심이 상체로 바뀌는 바람에 자신이 느끼기에도 흔들흔들 상체가 흔들려서 걸음 걷기가 무척 어렵다는 것은 경험 해보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산 교육이다.
그래서 나는 종주 끝까지 샘 정보에 따라 주행속도와 시간을 �추었다.
그러니 통상 아침 출발 시는 3L의 물을 항시 휴대하였다. 혹자는 왜 그렇게 많은 물을 마시느냐고 반문하시겠지만 그건 모르시는 말씀, 나는 순수하게 식수만으로도 1.5L는 있어야 했다.
아마도 내가 물을 많이 마시고 땀 배출을 잘하였기 때문에 건강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가 자위해 본다.
백두대간 종주는 이제 명칭을 바꾸어야 한다. 적어도 몇 년 전 까지만 하여도 대간종주는 독도술이 필수였었다. 그러나 이제는 독도술은 거의 쓸모가 없다.
고생이 되더라도 길을 잃고 헤매이다 주능선을 자신의 독도술로 찾아내는 재미(?)가 없어졌다.
그러니 이제는 백두대간 답사 정도로 격하시켜야 하지 않을까?
가이드 인솔하에 새벽 2~3시부터 후라쉬를 밝히고 인솔자를 줄 줄 따라가는 것이 어떻게 백두대간 종주란 말인가?
묘하게 돌아서 이어지는 대간능선을 몇 군데나 확인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나는 깃대봉에서 육십령으로 하산 도중 샘터를 지나 900고지에서 동북쪽 아래 넓은 초원 안부를 보았을 때 그곳이 분명 물길이고 그 오른쪽 어디로 살짝 돌아 내려 갈 줄 알았다. 그런데 내려가면서 보니 정 북쪽으로 급경사를 한참 내려와서 우측으로 반원을 그리며 돌아서 왼쪽으로 나가는데 그 대간능선의 흐름이 참으로 묘하다. 이건 어떻게 보면 대간종주자를 골탕 먹이려는 조물주의 장난 같기도 하다.
우리의 국토 삼천리 반도는 하나의 산이다.라는 현장을 실감하게 되는 순 간이였다.
등산을 시작한지 20여년 수많은 산, 산, 산, 봉, 봉, 봉을 올라 보았고, 그 때마다 다른 하나의 산으로만 알고 다녔었는데---.
그러나 대간종주를 반 넘게 진행한 다음부터는 불현듯 아! 우리국토는 하나의 산이며 모두가 그 큰 산의 줄기 였었구나! 하고 느껴진다. 그저 대한민국, 경기도, 강원도 하듯이 인간이 붙여놓은 설악산, 태백산, 오대산, 지리산이었을 뿐이다.
먼 옛날부터 인간의 삶은 강(물)을 중심으로 모여 살았고 산을 경계로 갈라져 살아 왔다.
강을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이 형성 되었듯이 산을 경계로는 이질적인 문화가 형성된 이유를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백두대간 종주는 각 개인의 집념의 결정체이다. 하루 이틀도 아닌 5~60일을 산에서 자고 먹고 무거운 배낭으로 10여 시간씩 걷는다는 것은 인내의 극한 상항까지 돌파하는 행위이다.
산행을 하다보면 경치도 좋고 울창한 수풀도 맛나고 멋진 바위봉도 만난다. 이런 때는 힘든 것도 모르고 걸음이 저절로 가벼워진다. 그러나 싸리밭, 잡목밭, 너덜지대 같은 곳도 통과하게 되는데 이런 곳에서는 저절로 "내 다시는 이 길을 걷지 아니하리" 이다.
또 평균 하루에 2개 이상의 높은 봉(표고차가 큰 것)을 올라야 한다. 오전에 체력이 좋을 때 오르는 것은 비교적 괜찮으나 오후에 올라야 하는 큰 봉은 정말 죽을 맛이다.
산 정상에서 다음 산을 향하여 안부로 내려설 때 수풀 때문에 그 안부가 얼마나 깊은지 알 수가 없다 내려가다내려가다 끝이 안보이면 죽었구나 하고 생각한다.
다행이 지나온 봉과 앞의 봉 높이를 알면 안부에 내려선 다음 표고차 얼마를 올라야 하니 몇 분, 몇 시간이 걸리겠구나 가늠이라도 하지만 나처럼 개념도만 휴대 했다면 그것도 안되니 시야가 트이는 곳에서 대충 가늠해야 한다.
그것도 숙달이 되니 어느 정도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말이 30분, 한 시간이지 지칠대로 지친몸으로 30분 아니 한 시간을 산정을 향하여 오르다 보면 별의 별생각이 다 난다. 호홉은 턱밑까지 차오르고 다리는 떨어지지 않고 정상은 보이지도 아니하고 숲속으로 하늘이 빼꼼 보이기만 하면 이제 다 왔구나 싶허 한발 두발---,백까지 세어본다 아직 멀었다, 이백까지 세어본다 아직, 이다. 결국 오백정도 세어야 그것도 정상이 아닌 능선에 올라선다.
내 인생 60여년에 이런 인내와 끈기로 도전해 본 일이 있었던가?
아니! 없었었다. 이 백두대간 종주 말고는---.
나 스스로 생각 해봐도 대단한 일을 하였다.
집념을 갖고 하면 못할 일이 없다는데 이제 얼마 남지 아니한 나의 여생을 보람되게 살아가기 위해 이 종주기를 정리 하면서 마음을 다시 한 번 다 잡아 본다.
나의 백두대간 단독종주가 훌륭히 성취되도록 협조 해주신 모든 분들께 심심한 사의를 표합니다.
종주를 마치고 이 경 구
별표 1-1 백두대간 종주계획표
계획표는 4월17일로 되었으나 실제는 16일 치밭목으로 진출하였고 적색원내 숫자가 숙박지입니다.
별표 1-2
별표 2 해당 국립공원 관리사무소 소장님께
해당국립공원을 일일이 찾아 나설 수 없어서 등산허가신청서를 작성하여 아래와 같은 서신을 동봉하여 발송하고 하회를 기다리는 수 밖에...
드디어 3울 19일부터 허가서가 속속 도착하더군요. 그 기쁨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습니다.
백두대간 종주하다 만난 산님들의 리번입니다. 소백산에서 죽령매표소를 통과해야 하기때문에 유일하게 한번 입장료를 내었습니다.
2000년 1월 11일 봉황산으로 산행을 나섰다가 정상에 그대로 있는 것을 기념으로 회수 해 왔습니다. 그리고 같은해 11월 9일 탄마산악회를 인솔하고 정령치로 산행하던중 회원들과 대화하는 한국철차 대간종주님들이 바로 본인과 금대봉지나 수아밭령에서 만나 건방을 한 보따리 주던 그 젊은 친구들 일 줄이야!
배중기 화백이 그려준 걸작? 그 후 본인의 불찰로 연락이 두절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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